측우기 제작 및 제도의 시행
측우기 제작 및 제도의 시행
측우기
측우기는 유럽 나라보다 약 200년 앞서서 만들어졌으며, 당대 조선의 과학기술력을 짐작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측우기는 조선 시대에 강우량 분포를 측정하던 기구로서,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입니다.
조선 세종 때 처음 만들어 전국에 보급시행하였으며 조선시대 전반에 걸치어 활용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단 하나의 측우기는 1837년 만들어져 공주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금영측우기(보물 561호, 국보 승단예정)이며 정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의 관측 기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제작 및 제도의 시행
측우기 제도의 시행
측우기가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것은 호조에서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해 보고한 1442년(세종 24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 이전으로 여겨집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서 측우기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쇠로 제작된 측우기는 길이 1척 5촌(약 32cm), 지름 7촌(약 15cm)이며, 비가 그친 후 주척을 써서 푼 단위까지 재고, 비가 내리기 오픈한 시간과 그친 시간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도록 했습니다.
측우기 제작
조선 초창기에는 농업 등에 참조하기 위해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방책이 있었는데, 이는 비온 후에 고여 있는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흙에 스며드는 정도가 서로 달라 1441년(세종 23년) 음력 8월 장영실을 시켜 서운관에서 빗물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릇을 처음 제작하게 하였고, 한양을 기운데로으로 관측에 활용하였습니다.
1442년(세종 24년)에는 측우에 관한 전략을 정하여 서운관에서 빗물의 깊이를 측량기록하게 했으며, 지방에서는 각 관가의 뜰에 설치하여 수령 자신이 측량기록하게 했습니다.
초반에는 쇠로 만들었으나 뒤에는 구리로 만들기도 하였고, 이외의 생각은 자기도기로 대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이탈리아의 가스텔리보다 약 200년 앞선 겁니다.
측우기는 흔히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는데, 세종실록 23년 4월 을미(양력 1441년 5월28일) 근년 이래로 세자(훗날 문종)가 가뭄을 근심해서 비가 올 때마다 비 온 뒤에 토양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완벽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추적했다는 기록은 문종에 의해 발명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측우기는 문종,장영실,세종대왕,호조의 관료등이 속뜻을 모아 세계최초로 개발한 규격품임을 잘 알수있습니다.